[시진핑시대 핵심100인]<7>보시라이-②종횡무진한 8대원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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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4-2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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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16세였던 보시라이(薄熙來)는 베이징 4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보이보(薄一波) 당시 국무원 부총리가 주자파로 몰려 감옥에 갇히자 그의 집안에 광풍이 불어닥쳤다. 모친인 후밍(胡明)은 1967년 광저우(廣州)에서 주자파의 아내라는 이유로 군중들에게 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길에 기차 안에서 홍위병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4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홍위병들은 보시라이와 그의 형제들에게 보이보의 반역증거를 내놓으라며 가열찬 사상비판을 가했고, 보시라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劉少奇) 등 주자파로 몰린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교류한 서신들을 친한 친구에게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홍위병의 광기에 겁이 질려 사진과 서신을 홍위병에게 건네게 되고,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江靑)은 직접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감옥에 가두라”라고 지시했다.

이로서 17세의 보시라이는 아버지의 사진을 숨긴 죄로 반혁명현행범으로 몰려 5년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72년 출옥한 이후 공장근로자로 하방당했던 보시라이는 1979년 베이징대 역사학과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82년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이후 곧바로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 배치되어 일했다.

하지만 보이보는 보시라이에게 지방으로 내려갈 것을 권유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방기층에서의 경험이 아들의 커리어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미 시진핑과 류사오치의 아들인 류위안(劉源)은 편한 중앙관직을 버리고 지방으로 떠났던 터였다. 이에 보시라이는 1984년 지방 근무를 자청해 랴오닝(遼寧)성의 농촌인 진(金)현 부서기로 내려간다.

연고가 전혀 없었던 곳인 만큼 업무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난관을 열심히 극복했고 4년 뒤 다롄(大連)시 선전부장으로 승진해 떠날 때 진현은 환골탈태해 있었다. 진현은 다롄시 진저우(金州)로 바뀌었고 지방기업, 과학기술, 교육, 체육 등 10여 개 분야에서 최고 평가 점수를 받았다.

◆다롄의 세가지 보물

보시라이는 이후 12년간 다롄시에 근무했다. 이 기간 중 다롄은 ‘북방의 상하이(上海)’라고 불릴 정도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93년 다롄시장에 취임한 뒤 다롄은 매년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완벽한 공업도시로 탈바꿈됐다. 다롄은 현재 중국 내에서 ‘가장 깔끔한 도시’, ‘환경도시’로 꼽힌다. 그는 중국환경보호계의 최고상인 ‘중화(中華) 환경상’의 첫 수상자가 될 정도로 다롄의 환경 정화에 주력했으며, 다롄을 2001년 유엔 선정 세계 500대 미화 도시에 들게 했다.

보시라이는 청렴성과 근면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고 한다. 다롄시의 한 관계자는 “가장 먼저 출근하고 퇴근시간 뒤 불시에 회의를 열어 간부급들은 저녁시간에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일에 열중했다. 다롄시 사람들은 축구와 복장, 보시라이를 합쳐 ‘다롄 삼보(三寶, 세가지 보물)’이라고 찬사를 했다.

2001년 보시라이가 다롄을 떠날때 1만명의 시민들이 시정부 청사 입구로 몰려와 그를 배웅했다고 한다. 다롄일보는 당시의 상황을 “보시라이는 200미터의 도로를 걷는데 1시간이 소요됐다. 이른 아침 해군광장에 주민위원회의 할머니, 퇴직직원, 학교의 교사, 택시기사 등이 모였으며 그들이 모인 것은 보시라이에게 진실로 아쉽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보도했다.

◆랴오닝성에서의 불화

다롄에서의 기반을 통해 그는 2000년 랴오닝성 성장으로 승진이동한다. 이후 그는 낙후된 랴오닝의 산업 발전에 매진했다. 랴오닝성의 사업가 1000명을 대동하고 중국 남부의 잘사는 광둥(廣東)성을 찾아가 상품 전시와 경제협력 상담을 벌이며 벤치마킹하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가 추진한 ‘동북진흥’ 정책은 2003년 중앙정부의 국가전략으로 채택됐다.

타성에 젖은 관료들을 개조시키기 위해 싱가포르, 홍콩 등지로 연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성내 14곳의 시장을 비롯해 모두 280명과 함께 투자유치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해 놀라게 했다. 당시 한국 정관계 재계 인사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의 업무스타일은 랴오닝성의 부하관료들에게도 고난이었다. 한밤중에도 부하를 찾아 업무를 물어보는 것은 그의 장기다. 각종 행사와 접견 등으로 근무시간에 업무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대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했다.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전화로 부하를 찾는 일이 많았다. 혹시나 전화를 받지 못한 간부에겐 불호령이 내려졌다. 그는 밤 11시 이전에는 절대 휴대전화를 꺼놓지 말 것을 지시했다. 11시 이전에 잠을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하는 간부에게는 “업무가 적어 그렇게 빨리 자느냐”며 다른 일을 추가로 안겼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인기가 좋을 리 없었다.

랴오닝 성장 재직시절엔 업무에 간섭하는 원스전(聞世震) 당서기에게 “나는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임명했으니 당신은 당무나 봐라”며 행정업무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화가 난 원 서기가 중앙에 올라와 “나를 자르든지 보시라이를 내쫓든지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가 2004년 랴오닝 성장을 마치고 중앙으로 올라올 때 환송연에는 서기는 물론 부서기조차 불참해 썰렁한 분위기였다.

◆종횡무진, 상무부장

2004년에는 베이징을 떠난 지 20년 만에 국무원 상무부장이 되어 컴백했다. 상무부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맞추어 대외경제무역부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를 통합해 신설한 부서였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최고 지도자들이 보를 차기 총리로 만들기 위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주요 경제발전 계획 수립에 참여하고 대외경제 교섭을 담당하는 곳이니 차기 총리의 수습부서로서는 적격이었다.

그는 다롄과 랴오닝에서 보였던 과감한 모습을 버리고 신중한 처신을 했다. 국무원의 장관은 지방정부의 고위관료와는 다르게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며 우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한다.

하지만 관료조직 내에서의 엄격한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위 ‘보(薄)15조’라는 것을 발표해 관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보15조는 공무원들이 대외활동을 할 경우 대화를 반드시 녹음해야 하며, 활동이 종료한 지 2시간 내에 반드시 문자기록을 보고해야 하며, 4시간내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고위관료들의 휴대폰은 24시간 켜져 있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은 상무부장으로서 외국과의 협상이 이어질 때 요긴하게 사용됐다. 2005년 미국과의 회담중 미국측의 통역이 신속정확하지 못하자 보시라이는 참지않고 “우리의 일정은 촉박하고 회담시간은 한정돼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중국측 관료들은 모두 영어에 능하니 통역없이 회담하자”고 말해 회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보시라이에 대해 “그는 어느시점에 양보를 해야 하며, 어느시점에 강수를 둬야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학습능력이 좋아 새로운 무역문제에 대해서도 잘 숙지하고 있다. 또한 무역불공정 문제가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 보시라이의 외모와 언변 등 개인적인 매력은 중국측 협상력을 배가시키고 있다”고 평했다.

독일의 잡지인 차이나데일리는 “그는 미디어와의 교류에 능하고 유창한 영어와 국제무대에서의 활동능력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력이 급부상하고 있는 시기에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며 높게 평가했다.

◆서방세계 대한 적극적인 발언들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지난해 1400억달러를 넘어서자 중국산 제품에 대해 27.5%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러자 보시라이는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복관세 부과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약 위반이며 무역 패권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무역적자의 상당수는 미국계 기업들이 중국에서 제품을 만들어 다시 미국으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라며 “중국 정부는 결코 대규모 무역흑자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중국에서 중개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일본과 한국에 대한 적자분이 중국으로 이전된 것도 부분적인 이유”라고 설명했다.

보시라이는 2005년 중국이 아프리카를 신식민지로 만들고 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아프리카 주민들은 자원을 약탈하는 식민주의자들을 절대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보 부장은 중국이 아프리카 석유를 싹쓸이한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중국은 지난해 아프리카 석유 수출량의 8.7%를 수입했다”면서 “이에 반해 유럽은 36%, 미국은 33%나 쓸어갔다”고 설명했다.

◆8대원로인 아버지 보이보

1908년 2월17일 산시(山西)성에서 태어난 보이보는 지난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재정부장을 역임했고, 1956년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이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부총리 겸 국가경제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문혁 당시 주자파로 몰려 실각된 후 옥고를 치르다 1979년 국무원 부총리로 복직했다. 보 전 부주총리는 지난 87년 1월 정치개혁을 시도하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를 축출시킨 ‘8대 원로’의 일원으로서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중국의 8대원로는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하는데 공이 큰 원로 8명을 예우하기 위해 마련된 말로 원래는 덩샤오핑(鄧小平), 천윈(陣雲), 양상쿤(楊尙昆), 보이보, 펑전(彭眞), 리센녠(李先念), 왕전(王震), 덩잉차오(鄧潁超)를 칭했다. 하지만 1994년 리세녠, 왕전, 덩잉차오가 사망하자 쑹핑(宋平), 쑹런츙(宋任窮), 완리(萬里)가 새로 포함됐다.

그는 1989년 4월 후야오방이 급사하기 전 정치노선을 둘러싸고 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는 후야오팡의 사망을 계기로 분출된 민주화 요구 시위를 유혈 진압한 천안문 사건에서도 다른 원로그룹들과 함께 덩샤오핑을 찾아 “사태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으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지경입니다. 과감한 조치를 취해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고 제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7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인도 국무원 부총리 출신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같은 산시(山西)지역 혁명가 집안의 리단위(李丹宇)다. 하지만 결혼 초부터 티격태격 싸우다 결국 4년여 뒤 이혼소송 끝에 갈라섰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리왕즈(李望知)는 베이징대 법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유학했다. 원래 이름은 부친의 성을 딴 보왕즈(薄望知)였으나 전처 리단위가 이혼 후 자신의 성으로 바꾸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아내인 구카이라이(谷開來)는 1974년부터 사귀기 시작해 결혼까지 이어졌다. 장인 구무(谷牧) 역시 부총리를 지냈다. 1987년생인 아들 보과과(薄瓜瓜)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 중이다.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준수한 아들은 지난해 ‘영국 10대 걸출 중국 청년’에 꼽히기도 했다.

보과과는 올해 초 8대 혁명 원로인 천윈의 손녀이자 천위안(陳元) 중국국가개발은행 회장의 딸인 천샤오단(陳曉丹)과의 염문설이 나돌기도 했다. 올해 초 홍콩 신문들은 보과과와 천샤오단이 지난해 다른 친구들과 함께 티베트(西藏)를 여행할 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400장 가까운 사진이 바이두(百度)를 비롯한 중국의 인터넷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에 유출됐다고 보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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